시백준혁시백 소설본 샘플

2014. 1. 27. 05:04썰썰썰/회색도시


시백준혁시백 소설본 '우산' 샘플입니다.

 

—아, 그래. 그 날도 이렇게 비가 왔었던 것 같다.

이미 진한 회색빛으로 뒤덮인 하늘에서는 하염없이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셔터가 내려져있는 어느 가게 앞에 서있던 그는 정신없이 쏟아지는 비에 이미 외투는 반쯤 젖어있었고, 새하얗던 도복바지도 지금의 하늘처럼 짙은 회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발에 못을 박은 듯 계속 그 자리에 서있었다. 조금 쌀쌀한 듯 몸을 살짝 떨며 두 손으로 들고 있던 우산손잡이를 오른손에 고쳐 쥐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왼팔을 폈다. 앞으로 쭉 내밀자 우산 밖으로 손가락 끝이 튀어나왔다. 우산 밖에 내밀어진 손가락들도 천천히 비에 젖어가고 있었다.

“…선생님.”

뿌연 입김이 허공에 흩어졌다. 그가 눈앞에 있는 가게를 보며 선생님, 선생님하고 중얼거리자 뿌연 입김이 나오고,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갑자기 비가 맞고 싶어졌다. 그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오른손에 들고 있던 우산을 천천히 바닥에 내렸다. 비는 여전히 사납게 오고 있었지만 우산은 계속 바닥에 내려놓은 채 내리는 비를 맞았다. 머리카락이 젖어 얼굴에 붙고, 외투와 바지는 이미 다 젖었지만 계속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선생님. 비 맞으면 감기 걸린다면서요. 그 때처럼 우산씌워주셔야죠.”

고통과 슬픔으로 끊어질 듯한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눈물인지 비인지 모를 물들이 얼굴에서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처음 고등학교에 들어가던 날, 그 날은 고등학교를 들어간다는 두근거림과 새로운 친구들을 만난다는 설렘, 기분 좋은 긴장감이 있었어야했지만 시백에겐 그런 평범한 것들이 전혀 없었다. 그는 이미 틀어질 대로 틀어져있었다.

시백은 닫힌 교문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환하게 웃으며 건물로 향하는 아이들, 줄을 정리하는 선생님들. 평범한 풍경을 교문 밖에서 바라보다가 등을 돌렸다. 마땅히 갈 곳이 없어 발길이 닿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반듯하게 교복을 입은 탓에 사람들이 시백을 힐끔힐끔거렸지만 사나운 인상 탓에 말은 걸지 않는 듯 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의 사나운 인상에 대해 아주 조금은 감사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걷자 날씨가 조금씩 흐려지기 시작했다. 마치 현재 시백의 기분을 하늘이 대변해주듯 진하게 흐려졌고, 이윽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한두 방울씩 떨어지던 비는 폭우가 되어 쏟아졌다. 우산이 없던 시백은 이미 온 몸이 축축하게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잠시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다 셔터가 내려져있는 가게를 발견하고 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것도 깔지않은채 젖어버린 시멘트바닥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나마 가게에 설치된 작은 천막이 비를 가려주어서 다행이었다. 시백은 무릎을 세워 자신의 몸 쪽으로 끌어당겼다. 두 무릎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흐느끼지도, 그렇다고 화를 내지도 않았다. 지금의 자신은 단지 계속 내리는 비에 조금 우울하다고 그뿐이라고 되뇌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비가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저기, 이봐요.”

빗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무릎에 고개를 파묻고 있을 생각이었던 시백은 거친 빗소리사이로 들리는 부드러운 음성에 슬쩍 고개를 들어 상대방을 확인했다. 눈만 떠 자신을 확인하고 아무대답도 하지 않는 시백을 보며 상대방은 살며시 미소지었다. 천천히 무릎을 낮춰 구부려 앉아 시백과 눈높이를 맞춘 그는 시백에게 자신이 쓰고 있던 우산을 건넸다.

“비오는 날 이러고 있으면 감기걸립니다. 여기, 제 우산쓰세요.”

시백은 상대방의 알 수 없는 호의에 갑작스레 짜증이 일었다. 기분이 나빴다. 쓸데없이 오지랖이 넓다고 생각했다.

왜 가만히 있는 상대에게 자신의 우산을 건네는 걸까, 이 사람은.